[영화 읽는 책방] (2) ‘못된 장애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니콜 뉴햄 <크립 캠프>와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3년 전 특수학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토요일 특별활동 시간에 선생님을 도와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였다. 봉사를 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주말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깝던 차에 ‘늘 아이들과 붙어있어야 하는 발달장애아의 부모님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겐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자’ ‘아이들이 음악과 체육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돕자’ 이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돌아보니 이상한 일이다. 분명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러 가는 봉사였음에도 왜 아이들에 대한 고민은 없었을까. 고백하건대 내게 그들은 서사를 가진 주체가 아니었다. 나름 스스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산다고 생각해왔던 나도 발달장애인을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해나가는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은 후에야 고민은 시작됐다.

책의 저자는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자 서울대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다. 흔히들 말하는 장애 ‘극복’ 스토리의 주인공인 저자는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성적 주체로서의 장애인, 삶의 주체로서의 장애인, 사회적 주체로서의 장애인을 말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미디어에 비친 장애인의 모습이 어땠는지 묻는다. 미디어에서 장애인은 정치인의 도덕성을 빛내주는 공연의 조연 혹은 가족영화 속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서 존재하지 않았나. 비장애인과 같은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 얼굴이 없는 존재, 익명화된 존재였던 것이다.
작가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번의 장애인 시위가 있었지만 장애인이 욕을 먹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판을 받았던 건 당사자가 아니라 같이 나온 그들의 가족과 지인이었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나와 이해관계를 두고 경쟁하고, 권리를 나누고,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욕을 먹지는 않았지만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장애는 없다>는 이렇게 시민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던 장애인이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찾아갔는지를 다룬다. 70년대 미국, 장애인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서 만난 10대 장애인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에 눈을 뜬다. 그 당시 미국은 지금의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장애인은 ‘분리 평등 정책’ 하에 사회에 섞여 살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이동권과 탈시설 등 장애인 시민권을 위해 나섰고 결국 변화를 만들어 냈다.

1970년대 미국 장애인 인권 운동을 다룬 이야기에서 나는 2020년대 한국을 봤다. 출근시간대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시위도 법을 지키면서 해야지!” “일반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지!” 같은 말들이 오간다. 언뜻 듣기에 합리적인 말이다. 법을 지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합의한 기본적 명제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룰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간과한다.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만큼 공정하고 합리적이라면 좋겠지만 실상 법은 불완전하고, 완전하게 무해한 시위는 바꿔야 할 것도 바꾸지 못한다. 얼마 전 한 라디오에서 장애인단체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실감했다. “왜 아무 잘못 없는 우리의 교통을 불편하게 하냐”는 반응에 대해 묻는 진행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이 자리에 와서 꼭 이 한마디만큼은 하고 싶었는데 여러분 덕분에 이 사회가 여기까지 바뀌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참아주신 덕분에, 한국 사회에 서울에 엘리베이터가 91%까지 설치되었고요. 저상버스가 55%까지 설치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장애인들끼리 정치인에게 찾아가서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설치해 주세요라고 하면 절대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장애 시민분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이것 좀 어떻게 처리해라라고 얘기하는 순간부터 정치인이나 관료분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이게 딜레마고 정말 못된 장애인으로서 죄송하지만, 시민 여러분들이 불편함을 감수해 주신 덕에 한국 사회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꼭 그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말했듯이 급진적인(?) 장애인 인권운동은 시민 불복종의 일환이다.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 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리는,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 걸기’ 행위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효과가 없고, 소수자의 의제에 다수자가 무관심하거나 변화의 의지가 없을 때, 불복종의 방식으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사안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마틴 루서 킹이 이끈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하는 대표적인 시민불복종이었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p166)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일을 누군들 좋아서 하겠는가. 무섭고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내 일이니까 하는 거다.

시민불복종의 형태로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점거하는 시위에 어떤 사람들은 ‘병신’이라며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지만,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앞선 인터뷰의 청년도 ‘못된 장애인’을 자처했지만, 연신 시민들에게 고맙다는 그의 답변은 못된 내가 듣기엔 너무나도 착했다.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못된 장애인’들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조금 더 나쁘게(?) 들리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교장 박경석의 말로 글을 마친다.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영화 읽는 책방]에선 영화와 책을 함께 소개합니다.
영화로 책을 읽고, 책으로 영화를 읽는 코너를 지향하지만 가끔은 얼레벌레 일기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인터뷰
https://www.nocutnews.co.kr/news/5538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