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개봉한 지 3년 된 영화를 이제야 봤다. 영화는 진즉 왓챠 ‘보고싶어요’에 눌러 뒀지만 오랫동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몇 주 전 스터디가 끝나고 집에 걸어오던 길 별안간 ‘어디든 떠나서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영화를 틀게 됐다.
영화의 내용은 별 거 없다.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임용고시생 ‘혜원’은 시험에 떨어진 채 시골에 돌아온다. 금의환향이 아닌 단출한 귀향이었다. 자신의 소식을 엄마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은 채 잠수를 타듯 돌아왔다. 잔잔한 이 영화에 내가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영화의 초반부에 제시된 이런 주인공의 배경 때문이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사실 공중에서 툭 튀어나오는 종류의 생각이 아니다. 몇 주 전의 난 연이은 최종탈락 소식을 받아들었고 기대했던 관계에서마저도 미끄러졌다. 정말이지 혜원에 공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마음의 바닥을 찍은 시점에서 시작한다. 시골로 돌아온 혜원은 편의점 도시락 대신 농작물로 한 끼 한 끼 만들어 먹는다. 어릴 적 친구들도 다시 만나 시골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혜원은 자기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어쩌면 영화라 너무 쉬워 보이기도 하는 주인공의 회복과 성장이지만, 이 과정에서 난 음식의 무게(!)를 다시금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 함께 볼 소설은 레이먼드 카버의 책 『대성당』에 수록돼 있는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이 책의 중심인물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빵집 주인이다. 앞선 영화와 비슷하게, 이 소설의 시작점 역시 주인공이 인생의 밑바닥을 밟았을 때다. 주인공 부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였던 아들이 의사도 발견하지 못한 특이증상으로 죽게 된 후, 안정적인 궤도를 달리던 그들의 삶은 갑작스럽게 붕괴된다.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을 꺾어버리거나 내팽개쳐버리는 힘들”은 사실 한 뼘 차이로 그들 옆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혼자만의 삶 속에서도 연결의 순간은 찾아온다. 카버의 소설은 타인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을 보여준다. 남편과 아내가 빵집에 앉아 주인이 건네 준 ‘시나몬롤’을 먹는 순간이 바로 그 연결의 순간이었다. 갓 구워낸 시나몬롤과 커피가 남편과 아내의 허기진 마음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음식’이라는 것이 내게도 항상 그런 존재여서 그런지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끄덕거렸다.
나는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좋고 보는 것도 좋고 공부하는 것도 좋다. 요새는 하지 않지만, 예전 몇 년간은 요리하고 빵 굽는 게 취미이기도 했다. 이별한 후 생활이란 게 귀찮게 느껴질 때도 마시멜로를 띄운 따뜻한 코코아는 잠시나마 나의 고통을 잊게 만들어줬고, 야채를 씻고 고기를 썰고 면을 볶는 요리의 단순한 과정은 앞이 보이지 않는 수험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내가 유별나게 음식을 좋아해서인지 모르지만, 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전해주는 가장 실재적인 매개가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장을 봐서 (혹은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먹는다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한 사람의 영혼에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남은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 해도, 가끔 빛이 잘 드는 곳에 앉아 과일을 베어 먹는 날이나 이른 아침의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먹을 수 있는 날들이 끼워져 있다면, 기꺼이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의 원제는 “A Small, Good Thing”이다. 정말 사소해보이지만 나의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것들. 누구나 유독 사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영화 속 혜원도, 소설 속 부부도, 그리고 나도 인생에 마가 낀 것 같은 시기를 건너는 중이다.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맛있는 음식이기도 하고 함께해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리틀 포레스트> 속 음식의 비주얼에 홀리기 마련이지만 주인공 옆의 두 친구도 빼놓을 수 없다. 늘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A Big, Good Thing"인 걸로!
※ [영화 읽는 책방]에선 영화와 책을 함께 소개합니다.
영화로 책을 읽고, 책으로 영화를 읽는 코너를 지향하지만 가끔은 얼레벌레 일기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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